[朴サンジンの我が絵内の樹木読み] [9] (躑躅下の春遊び)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サンジン慶北大名誉教授

 高名方達がうららかなしむために芸者れて春迎行事いた. 巨大がそのままにじみている山裾. ではソウル付近等中部地方しくない花崗巖岩山背景. 左側傾斜黑靑色稜線って大小樹木いてある. 広葉樹っぱが季節だけに常葉樹であるしたのだ. 岩山溪谷右側山麓にはかなり躑躅数木っている. のみ満開はつぼみをんでいる. ただいまんにいている. 賞春野興という題目野外景色しむとの意味. 蕙園申潤福惠園傳神帖せてあるつだ.

 からたのをらせてくれる多花には華奢躑躅けない. 季節では陽曆4月 初頃三月三日前後. この頃百姓達外出チヂミをいてべる風俗もあったが, 高官達はこのように芸者んで春遊びをしんでいる. 畫家のまた意圖垣間見られる. 薄桃色躑躅とほとんど. 薄赤くてきれいにえたらみたいに綺麗だと. 桃花色とも女性的魅力充滿だとの意味. 画家躑躅芸者える春情せてあげようとのことだ. これを强調しようとの躑躅花色をより濃密した. この酒邪巨杯, 年少踏靑等芸者登場する申潤福風俗畵には躑躅がよくかれている.

  には築台んで四角った. 四角った天圓地方思想から起源したのだ. このようながある程度なら此所両班家後園とか權力者別莊である可能性. 二名芸者左右っている堂上品階高官達今日春遊びの主人公. っている右側二人隨行員樂工三名演奏大琴奚琴及調律している. 石築ってって使いをする女人高官達っている. 食膳上飮食簡便である. 酒一本杯一, さな全部. 準備すぐ本格的春遊びがまる直前簡単酒案床でまず口直をしようとのようだ.   <オピニオン [朝鮮日報]>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 읽기] [9] 진달래꽃 아래 봄놀이 :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1.04.02

지체 높은 분들이 화창한 봄날을 즐기기 위하여 기생을 데리고 봄맞이 행사를 벌였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산자락이다. 바위의 생김새로는 서울 부근 등 중부지방에 흔한 화강암 바위산이 배경이다. 왼쪽 산은 경사가 급하고 거친 흑청색의 능선을 따라 크고 작은 나무가 그려져 있다. 활엽수의 잎이 피기 전의 계절이므로 늘푸른잎나무인 소나무를 나타낸 것이다바위산의 계곡과 오른쪽 산자락에는 제법 굵은 진달래 몇 그루가 자리를 잡았다. 위쪽 가지만 꽃이 활짝 피었고 아래 가지는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다. 이제 한창 꽃이 피고 있는 중이다. 상춘야흥(賞春野興)이란 그림 제목은 야외에서 봄 경치를 즐긴다는 뜻이다.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들어있는 그림 중 하나이다.

 예부터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여러 꽃 중에는 화사한 진달래꽃도 빠지지 않는다. 계절로는 양력 4월 초쯤에 해당하는 삼월삼짇날 전후이다. 이때쯤 백성들은 봄나들이를 나가 꽃전을 부쳐 먹는 풍속도 있었지만, 고관들은 이렇게 기생을 불러 봄놀이를 즐기고 있다화가의 또 다른 의도도 엿보인다. 연분홍으로 피는 진달래꽃은 복숭아꽃과 거의 같은 색이다. 여자의 볼이 발그스레하여 아름답게 보이면 복사꽃처럼 예쁘다고 한다. 도화색이라고도 하며 여성적 매력이 충만하다는 뜻이다. 화가는 진달래꽃으로 봄을 나타내고 기생과 함께 흥을 돋우는 춘정(春情)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이를 강조하려는 듯 진달래꽃 색깔을 더욱 진하게 나타냈다. 이 그림을 비롯하여 주사거배, 연소답청 등 기생이 등장하는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진달래꽃이 흔히 그려져 있다.

 아래로는 축대를 쌓아 네모난 연못을 만들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런 연못이 있을 정도이면 이곳은 양반가의 후원이거나 권력자의 별장일 가능성이 높다. 두 기생의 좌우에 앉은 당상의 품계를 가진 고관들이 오늘 봄놀이의 주인공이다. 서 있는 오른쪽의 두 사람은 수행원이며 악공 셋은 연주를 위하여 각각 대금과 해금 및 거문고를 조율하고 있다. 연못의 석축을 따라 술상을 들고 심부름하는 여인이 고관들 앞으로 가고 있다. 소반 위 음식은 단출하다. 술 한 병과 잔 하나, 작은 안주 그릇이 전부이다. 준비가 끝나고 곧 본격적인 봄놀이가 시작되기 직전에 간단한 주안상으로 먼저 입가심을 하려는 것 같다.   <오피니언>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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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안의 여자 : 이츠키히로유키(五木寛行)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양산을 쓴 젊은 여인과, 모자를 쓴 어린이가 마주 쪼그리고 앉아 조개를 줍고 있는 사진이다. 이미 노랗게 변색되어 있어 그것이 상당히 세월이 지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사진을 나는 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 일본으로 철수한 뒤에 처음으로 보았다. 나의 친척집 앨범에 붙여있는걸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그건 어렸을 적의 나와 나의 어머니 사진 같았다. 어머니는 아직 그 땐 20대 종반에 걸려있을 시기가 아닐는지.

우리들은 패전 후 외지(外地)로부터 귀환할 때 일체의 서류나 사진 따위를 가지고 돌아오는 일을 금지 당했다. 그 때문에 13세 이전의 내 사진이라는 것이 내 주변에는 몇 장 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몇 장도, 오래 전에 한국에서 내지(內地)의 친구나 지인에게 보내놓은 걸 나중에 되돌려 받은 것이다.

난 여러 가지 일을 쓰면서 살게 되고 부터도 자신의 모친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의 프로에서 어머니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라는 등의 기획이 있거나 해서, 내게도 때때로 출연의뢰의 전화가 걸려오거나 하지만 난 아직 한 번도 거기에 응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모친은 벌써 25년 전에 사망하셨는데요.’  라고 대답하면 상대는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라던가, 개중에는,

그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라는 등 끈질기게 구는 프로듀서도 없지는 않다.

나는 정말은 자신의 모친에 대한 예날 일을 생각해내는 일이 싫은 것이다. 어머니는 오랜 병으로 누워있었고, 패전 후의 혼란 중에 사람들에게는 말하기 싫은 죽음을 하셨다 그리고 난 그 일을 20수년 동안, 잊자, 잊자, 마음먹으면서 살아왔다. 헌데 묘한 일로, 세월이 지나는데 따라 역으로 조금씩 그 일을 확실하게, 그리고 자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난 아직 자신의 육친 일을 소설이나 수필에 마음먹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까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느낀다. 언젠가는 나도 40세가 되고, 50세가 되어, 슬슬 자신의 인생 종말을 생각하게 되는 때가 올 게 틀림없다. 그럴 때, 처음으로 나는 자신의 성장이라던가, 부친의 대한 것, 어머니나 여동생에 대한 것을 정확하게 생각해 내서 그것을 써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그런 때는 영구히 오지 않을 것인가.

나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후쿠오카(福岡)의 여자사범학교를 나와, 그 고장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던 모양이다. 자세한 건 모른다 그 때 가르친 사람들은 이미 지금은 훌륭한 어른이다. 난 스스로 그 때의 어머니를 생각해낼 수 없지만 배움을 받은 학생 측에서는 젊은 여교사의 일을 비교적 잘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과 만나, 역으로 그쪽으로부터 당신 어머니는, 이런 분이었어요.’ 등으로 알게 되는 건 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 어머니로부터는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어요.’ 하고, 언젠가, 한 중년 부인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그 당시는, 아니 지금도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동네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편견의 눈으로 보는 습관이 있었어.’

알고 있습니다.’

나도 그런 토지의 생도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화가 나는 일이라던가, 약이 오른 일도 적지 않았거든

그 부인은 남자처럼 꾸밈없는 말투로 얘기했다. 그 때문에, 나도 거의 신경 쓸 것 없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도시락을 먹으려고 생각했더니 젓까락을 잊고 안 가져온 걸 알았거든

네에

그래 난처해서 울상을 하고 있었더니, 당신 어머니가 자신의 젓가락을 수돗물로 씻어 갖다 주면서, 이걸 써, 하며 빌려 주는 거야. 그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거든.’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였습니까?’

그럼. 당신 따윈 알지 못하겠지만, 우리들이 당시의 지주님 댁에 일 도우러 가서, 쉬는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들은 마루에 걸터앉는데, 우리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거기에 차를 내놓았다고. 그 찻잔도, 절대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것을 쓰지 않았어. 우리들에게 나오는 찻잔은 정해져있어서, 매년 그 시기가 되면 우리들에게 쓰기 위해 창고에서 꺼내오는 거야. 그런 시대가 있거든.’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 사람의 그런 시대가 있었다, 라고 말하는 말버릇에는, 극히 옛날에 끝난 일이라고 느낀 게 아니고, 지금도 아직 꼬리를 물고 있는 현실에 대한 풀리지 않은 화가 느껴진 듯 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어머니는, 그런 시대에 내게 젓가락을 빌려 준거에요. 자신의 입에 넣는 거잖아요. 그런 만큼 어린 마음에도 무척 기뻤거든요.’

그랬습니까.’

뭘 먹는 도구를 빌려주거나 빌리거나 한다는 건, 좀 비위생적이라 마음에 걸리는데

하고, 내 곁에 있던 친척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러자, 우리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던 중년 부인은 웃으면서,

위생에만 마음 쓰고 있으면, 진정한 교육 같은 건 될 수 없지.’ 라고 말했다.

먹는 거라던가, 몸을 접촉시킨다던가, 그런 일로 관계를 잃고, 단지 지식을 파는 것만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교육 세계는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그렇지

, 누군가 타인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스포츠를 하거나 한 뒤, 그 사람과의 사이에 무거운 벽이 부서지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수가 있다. 아무리 좋은 강의를 해 주는 교수가 있다고 해도, 그건 그것뿐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연결은 위생관념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비위생적인 중화요리점 만큼 맛이 좋다고 하는 미신을 믿고 있는 한사람이기에, 원시적인 인간관계 쪽을 믿고 있다. 나의 어머니가 그런 형태로 한사람의 아동 기억 속에 살아있음을 아는건 기뿐 일이었다.

나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어느 시기,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던 탓도 있어, 무척 짜증스럽게 보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안 계신 밤에 나와 마주 앉은 어머니가 농담 같은 어조로 묻던 적이 있었다.

, , 혹시 내가 아버지와 따로따로 살게 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다니?’

혹시 내가 일본에서 살게 된다면, 이대로 압지와 평양에 남는가, 그렇지 않으면 함께 일본으로 가는가 묻는거야

왜 따로따로 살아

예를 들어 하는 이야기지만

글세

난 한동안 생각하고, 나는 한국에 남는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

어머니는 무철 슬픈듯한 얼굴을 하고, 그건 왜지, 하고 물었다.

그건--’

난 그 이유를 발 설명하지 못했지만, 그건 즉 내가 앞으로 여름방학 때, 아버지가 한번 데리고 돌아간 본토의 이미지가, 내게 있어 전혀 좋지 않았던 걸 의미했다.

난 큐슈(九州)의 방언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고 동연배의 아동들에게 구박을 받거나, 놀림을 받거나 했다. 나의 옷이 이상하다 하거는 웃고, 내가 여자 아이와 말을 했다고 해서 비웃던아이들의 일을, 난 그 어떤 원념(怨念)를 가지고 잊지 않았던 것이다.]

<본토의 아이들이 혹시 조선에 오면, 흠씬 괴롭힐 거다.>

난 여름방학이 끝나고, 관부(關釜)연락선이 시모노세키(下關)의 항구를 현해탄으로 출항해 나갈 때, 마음 속에서 그렇게 맹세했던 것이다. 그런 본토에 돌아가서 사는 건, 아무리 어머니와 함께라도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래. 너는 아다 아버지 편이 소중한거구나. 남자아이는 이래서 싫거든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인 건, 도대체 배후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건가.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을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부부 사이에 뭔가 트러블이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양친을 그대로 함께 살고 있었고, 나도 아무데고 갈 필요가 없었다 헌데, 그 어머니가줄을때의 아버지의, 마치 동물같은 통곡의 소리를, 난 지금도 뚜럿이 생각해낼 수 있다. 아버지는 일본제국의 패전보다도, 어머니의 불의의 죽음에 훨씬 큰 상처를 받은 듯이 보였다 그때부터 부친의 사는 방식이 변한듯했다. 그리고 본토로 돌아돠서부터는 한층 그 자포자기적이라고도 보이는 삶의 방식 커져, 이윽고 내가 도쿄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한창 때, 그자신도 불행한 죽음을 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시점부터 자신의 안쪽 뭔가의 나사가 망가져버렸다고 느낀건 아닐는지.

<만약 아버지와 따로따로 살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래?>  하고, 파고든 눈 색으로 묻던 어머니의 표정에, 나는 한사람의 여인 냄새를 느끼고, 문득 생생한 감개(感慨)에 채였던 것이다. 남자 아이에 있어서의 부모라는 건, 항상 어머니이고 여자라는 것이라는 2중성으로 존재한다. 나는 압지와 어머니가 갈라져서 살고 있게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또 어느 종류의 낙담도 외운 듯하다. 난 본토로 돌아가서 사는건 싫어서, 아버지와 산다고 말했지만, 물론 본심은 어머니를 따라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기분을 그녀는 아이를 보는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나는 어머니를 한사람의 여자로서 보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만큼 사회적인 강인함을 갖는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남자 아이에 있어, 아버지는 친구인 동시에 일종의 라이벌이기도 하고, 친자 관계를 조금이라도 빨리 끊어버리는 일이, 아이의 인간적 자맆에의 길이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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