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隊という言葉は昔も今も親を泣かせる   -   잡문 [雜文]/日本語

からだの具合いもだいぶ良くなったので、久しぶりに後輩のhomepageを
覗いたら, 掲示板に、彼女の軍隊服務中の息子が休暇を取って家に歸った樣子とともに、
いろんな面白い話が流麗な筆致で綴られていた。たっぷり附いているレスまで
讀みながら思わず微笑む。

家の息子が入隊したのはいつのことだったろう... ずっと以前のことだとしか
おぼえてないが、出發當時のことだけは昨日の出來事のようにありありと眼に浮かぶ.

召集場所の慶尙南道統營(本籍地)に父親を伴って向う息子を, 高速ターミナルまで
見送りに行った。息子の親友二人が待っていて、一緒に晝食を取った後、バスの
出發時間までコーヒーショップで待つ間、だまって息子の顔を見つめていると, 突然
店内に崔白虎(歌手)の ‘入營前夜’という歌が鳴り出した。私は止めどなく流れる涙を
隠しながらトイレへ立ったっけ。

やがて親子がバスに乘り, 窓に顔を附け息子が手をふると, 堪えていた嗚咽を押さえ
きれず、バスの後ろに回り聲を上げて泣いたら, 息子の親友が私の肩をそっと抱きながら
‘母さん, 泣かないで。僕たちもすぐ後から入隊します’...

二十年前の軍隊生活はまるで生き地獄だったと、經験者誰もが話すが
いろんな面で目まぐるしく發展した最近は、軍隊の設備も完璧で、訓練以外は
苦になることも別段ないそうだ。上官からいじめられたり殴られることもなく、
就寢前の休憩時間には好き勝手なことをして過すというから、たとえ
大事な一人息子を送っていても昔のように親の胸が痛みはしないと思われる.

あの時、令狀受けた息子に、男は軍隊を濟ませてこそ一人前になる, 韓國男性なら
誰もが濟ませねばならぬ軍服務だから胸張って行ってこい, と言った知人が、
いざ自分の息子に身體檢査通知書が屆けられると、血眼になってその方面の有力な
つてを探しまわり、ついに免除させたことなどがよみがえり、苦笑した。

徵兵制度. 韓國男兒の義務. 二年餘の軍服務.....
これを考える時ばかりは、女に生れて良かったと私も娘も胸をなで下ろ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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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cupper reply | del   2006.03.20 22:34 신고
    「親思う 心に勝る 親心 」 当時の私の心境は ただ淡々と入隊したことを 思い出します
    軍律厳しい団体生活 こちらも当時は 兵役を済ませることで 一人前と言われておりました 良い面も悪い面も覚える兵役 しかし男児は一度はこの厳しさを経験すべきと考えるものです 最近の当方のだらしない 若者を見るにつけ 人間修養にとって またとない機会ではないかと 感じる 今日この頃です
  2. yoohyun reply | del   2008.08.07 09:59 신고
    スカッパーさんは 海軍出身でしたね。たとえ60年前のことでも
    当時のことは何一つ忘れられないでしょう。あの時は死を覚悟の上で
    入隊するのだから親の心が張り裂けるほどだったでしょうが、
    戦時でもないのに、私どうしてああも悲しかったのか、今考えると
    可笑しくてなりません。
    コメント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내 안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 - 이츠키 히로유키 저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증명할 수 없는 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과학만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시장원리(市場原理)만으로 생활하고 있지도 않다. 증명할 수 있건 없건 간에 그것을 믿으면서 멋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아무런 지장도 없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요즘들어 갑자기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어쩐지 그 쪽이 자연스런 삶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그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직감이다. 멋스럽게 말하면 번득임이고, 낡은 표현을 쓰자면 감(勘)이다. 예전에는 육감이라고도 했다. 동물적인 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난 그쪽은 택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감이라는 쪽이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동물적인 감이라고 하면 뭔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주위의 냄새를 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별로 마음에 안든다.
그런 뜻에서 나의 지금까지의 생활을 뒤돌아 볼 때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 일만 하고 지냈다. 내 안의 소리에 충실하게, 이렇게 말하면 시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않한다는, 그 한가지를 완고하게 지키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예들 들어 엑스레이 촬영은 하지 않기, 같은 것이다. 주사도 내 몸에는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 피해왔다. 검사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검사라는 것 자체가 신체에 있어 환영받는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화학(위장된 학식-化學)적인 약품은 몸에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요는 병원을 되도록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치과에는 다니지 않느냐고 따지는 친구가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60대 중반에 들어서면 당연한 일로 이가 망가지게 된다. 인생 50년이라는 게 옛부터의 통념이지만, 아무튼 그 정도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용(耐用) 한도일 것이다. 좀 부풀려서 60세 정도가 인간의 적당한 수명이 아닐른지. 치아도 눈도 하반신도 망가지기 시작하는 건 자연의 이치이다.
그런 뜻에서 아주 가끔 치과의사의 신세를 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원해서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치과에 가되 가능한 한 근접하지 않으려는 게 내 방침이다. 이빨 치료를 받으려면 때론 렌트겐 폭격을 입게도 되고, 문제성 있는 혈액응고제 사용을 당하게 되는 위험성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양심적인 의사는 믿지 않겠지만 이 세상에는 상당히 뒤처진 전문가라던가 엉터리 프로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을 잘난척 쓰고 있느냐 하면 이 세상에는 필요도 없는데 무턱대고 병원이나 의사에게 의지하려고 드는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입원해서 종합검사하는 것이 취미인 양 부지런히 병원에 드나드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키고자 하는 자립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우선 문제인 것이다.
애당초 병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 그지없게 느껴진다. 인간이란 물체는 으앙, 하고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병을 안고 살아가게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 완전하게 건강한 인간 같은 것은 있을 턱이 없다. 죽음은 만인에게 세트 되어 있다. 포유동물에게는 동일하게 5억회 정도의 호흡과 100년 전후의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다.
다시말해 우리들은 모두 죽음의 캐리어(carrier)로서 탄생했다고 볼수 있어 이를 억제할 약도 의학적 수단도 없다.  만약 노화를 스톱시키는 약품이 출현했다고 칠 때 나는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 자체가 병이라고 본다. (内なる聲を聴くということ - 五木寬之著)
*        *        *
五木寬之의 [大河の一滴]라는 작품의 한 꼭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희 3남매의
생각과 똑같아 얼마나 반가왔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서너꼭지 더 번역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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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oohyun reply | del   2006.03.30 10:10 신고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은 사실 무척 마음에 걸린다. 불행하게도 몹쓸 병에 걸려 심각한 투병생활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게는 오만불손한 언행으로 받아들여지리라. 그러나 나는 필요없는 사람들이 병원에 몰려든다거나 자립심이 결여된 환자들이 툭하면 의사나 약에 의존하려고 하는 것에 딴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가벼운 감기 기운이거나 약간의 피로가 쌓일 때, 심하지도 않은 부정수소(不定愁訴)를 느낄 때마다 치료를 받고, 주사를 놔 달래고, 약을 얻고자 하는 안이함이 맘에 안든다는 이야기다.
    흔히들 말하는 종합병원에서의 3시간 대기 3분 진찰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어느 국립병원 의사가 자신의 진찰 기록을 체크해 봤더니 평균 환자 한사람에 2분밖에 할애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있었다면서 개탄하던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도 너무나 많은 시민이 간단히 병원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 어쩔 수 없을 때 이외에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의사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 찾는다.  어쩔 수 없을 때, 정말 다른 도리가 없을 때 진찰을 받고 의사에게 의지한다는 마음가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 덧 붙이자면 덮어놓고 과학이나 의학에 의존하지 말자는 것. 과학은 언제나 양날의 검처럼 유용한 면이 있는 반면에 위험한 요소도 지니고 있다. 의학과 기술의 진보에 의해 얻은 생명과 그로 인해 잃은 생명 중 과연 어느쪽이 많을까? 나는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의학이 만들어 내는 병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통계적으로 증명해 보라고 해도 나는 그것을 할 생각이 없는 것이, 통계나 수학 역시 현대의 커다란 병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는 정직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건 문제가 많은 인간들 아닌가. 문명의 이기(利器)라고 불리는 물건 가운데 흉기로 변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게 있다면 제발 가르쳐주기 바란다. (科学は常に両刃の剣である - 五木寬之著 )
  2. yoohyun reply | del   2006.03.30 10:18 신고
    그러나 말은 쉬워도 실행하기는 힘든 일, 가능한 한 의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꽤나 귀찮은 일이다. 그야말로 만병의 온상인 이 몸을 스스로 컨트롤해야 하기 때문이다. 컨트롤한다기 보다는 케어(care)한다고나 할까,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절충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일상생활 중에 실시해야 하는데, 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몸과 사권다, 곧 신체적 밸런스를 유지하는 일을 자신의 취미로 삼아버리면 되는 것이다.

    취미라고 말하면 하찮게 들리겠지만, 어쩌면 살아가는 목표도 되고 삶의 보람이 될 가능성도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연이나 우주의 신비와 접촉할 수 있는 경지에 까지 도달할런지 모른다. 종교라 함은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만이 아니고 의외로 그렇게 자신의 신체에 대해 골똘히 귀 기우리고 있을 때 맞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루겠다.

    예를 들어, 나라는 존재는 2중 나선구조로 되어있다고 생각해 보자.  2중 나선구조라 한 것은 물론 농담인데, 2개의 존재가 교차하고 있는 곳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자는 말이다. 하나는 일반적인 인간으로서의 나. 보편적인 인간의 일원으로서의 나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인간으로서의 상식이나 약속은 당연히 적용된다. 병이나 건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혈압이나 칼로리 계산, 그 밖의 의학적 이론과 치료 방법은 싫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하나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 일반적 인간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 끼워버릴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드넓은 세상, 몇십억 인간들 속에 섞여있는, 어디어디의 누구라는 나는 오직 하나의 존재이며, 그 밖의 어느 누구와도 다른 나 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부모와도 다른 나. 형제와도 다른 나. 그리고 전인류(全人流)의 과거에서 현재로의 흐름 속에서 절대로 일반적 인간이라는 개념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나.

    이를 오랜 불교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언어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언어를 나는 나름대로 [전우주에 오로지 혼자, 누구와도 같지 않은 유일 무이의 나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소중하다]와 같이 받아들였다. 이런 억지 해독을 옛날에는 <횡초(橫超)> 라고 부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다고 한다.

    나라고 말하는 자신이 두개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모든 인간과 공통되는 나와 그 누구와도 다른 오직 하나의 나. 이 두개의 내가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동조한다.
    예를 들어 36도8부의 열이 있다고 치자. 그것이 나에게는 어떠한 열인가 생각해 보자. 일반 인간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평균적 평열(平熱)이라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평열은 다양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5도8부가 보통이라는 사람도 있고, 늘 7도 이상이 평열이라는 사람도 있듯이 절대로 일정하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영양학에서는 칼로리 계산을 하는데,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있어 몇칼로리가 필요한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개개인에게 최적의 수치로 대응하는 일은 병원도 학교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더욱이 시장 원리라는 것은 가능한 한 하나를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성립하는 발상인 것이다.
  3. yoohyun reply | del   2006.03.31 16:09 신고
    세상의 상식에는 일반 인간으로서 대처한다. 그러나 또다른 개체로서의 나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내 직감이 ‘이 약은 먹고싶지 않다’고 하면 먹지 않는다. ‘수술은 받지 않겠다’라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면 그에 따른다.

    당연한 일로 리스크는 있다. 하지만 리스크라는 것 또한 양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과 개체로서의 나의 감각 중 어느쪽을 따르더라도 반반의 리스크는 있다. 그렇다면 나답게 살다가 죽는 쪽을 선택하자고 나는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쓸어지고, 몸의 이상(異常)을 느끼면서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피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행운이었을 수도 있고, 우연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점을 납득하고서도, 그래도 만약 병원에 가야할 필요가 세번 생긴다면 두번으로, 두번 가지않으면 안될 때도 한번으로 하자고 늘 명심해왔다. 좋아서 치료받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기 전에, 이상하다고 느끼면 바로 병원을 찾는 습관화된 감각이 내 안에 있지나 않은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직감에 대해서 처음에 썼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인간의 중심부분은 주변부분에 지탱되어있다, 라는 직감이다.  내장이나 뇌의 혈류는 중요하되 신체 각부분의 말단 혈류의 활성화가 보다 중요하지않을까, 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반도에서 비롯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발칸반도, 인도지나반도, 조선반도, 이베리아반도... 인간의 반도에 해당하는 부분을 중요시하라고 내 안의 소리가 일러준다.

    ‘하라하치부(腹八分)’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옳은 말이지만 인간의 일생을 통한 수치는 아니라 여겨진다. 나의 직감으로는 30대의 인간이 腹八分이다. 10대는 腹十分, 양껏 먹어야 된다. 20대에서 이미 면역의 중핵인 흉선(胸腺)의 성장은 정지된다. 따라서 20대는 腹九分의 연령이다. 30대를 腹八分라고 한다면 40대에 들어선 인간은 腹七分가 적당한 선이리라. 50대는 腹六分. 60대가 되면 腹五分면 충분하지 않을런지.
    그 다음 腹四分가 70대, 腹三分가 80대로 변화해나간다. 90대는 腹二分라고 하면 화를 내는 사람도 나올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腹五分의 세대에 해당한다. 그래서 식사의 양을 정량의 반으로 생각하고, 하루 세끼를 그만두고 한끼 반으로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정도가 딱 알맞다고 생각된다. 되도록 의료나 약품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생각이라면 이만한 일은 최저의 노력일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도 인간 일반에게는 상식이지만 개인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 태고에 인간은 야행성이었던 시기도 있다지 않는가. 농사를 짓기 전의 밤 형(型) 인간의 역사는 숨막힐 정도로 멀고 길다. 이슬람 사상에서는 밤샘이 미덕이다. 밤 형 인간이 일찍 일어나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는 게 나의 지론. 이렇게 해서 오늘 밤도 아침 여섯시에 침대에 들어 편안한 잠에 빠진다. 과연 내일은 올 것인가.  (五木寬之著 ‘大河一滴’ 중에서)
  4. vndrud1 reply | del   2006.06.07 15:20 신고
    이츠키 히로유끼의 소설 <어둠 그리고 둥지>,일본어로 된 원래의 제목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실수 있나요?꼭 알고싶어서 그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