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맛을 더하는 자기의 시대적 특징   -   민속문양 [民俗紋樣]


청화백자 보상화 당초무늬 작은병 - 조선 16세기

자연을 벗으로 삼으며 하늘을 숭상하고 땅을 신뢰했던 조상의 순박한 마음은 그릇을 만들 때도 그대로 반영되어 자연 문양을 기본 소재로 사용하였다. 농경 생활이 생업이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매우 민감했던 조상들은 비를 내리게 하는 구름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문양의 소재로도 자주 썼다.

구름은 용이나 기린, 봉황 등의 신령스러운 상징과 함께 쓰여 상서로움을 더하기도 하였고, 학, 소, 나무 등의 장수의 상징과 함께 쓰여 불로불사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인간 최대의 염원은 예나 지금이나 불로불사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사람들이 신에게 소원을 비는 제례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기에는 구름 모양을 새겨 그 표상으로 삼았다는데, 이것이 구름문양을 불로불사의 상징으로 삼게 된 기원이라고 한다.

선의 미학을 이용한 장식 문양으로 당초문을 빼놓을 수 없다. 당초문에서는 줄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줄기를 기준으로 꽃이나 잎사귀가 서로 엉클어져 연결되는 덩굴 무늬는 어떤 특정한 무늬와 무늬 사이에 생긴 빈 여백을 메우는데 특히 많이 사용된다. 식물 덩굴을 이용한 문양을 모두 당초문이라 하여 연꽃에 덩굴을 이으면 연꽃당초문, 용과 구름무늬와 함께 이으면 용구름당초문이라 불렀다. 당초문 역시 시대에 따라 특징이 달라졌는데 고구려 시대에는 단순하고 힘있는 모습으로, 신라 시대에는 단순하지만 유려하게,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그 화려한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우리 고유의 독특한 맛이 살아나는 서민적인 표현으로 정착하면서 백미를 장식하게 된다.

세계 도자 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분청사기가 출현함으로써 조선 자기는 창조적 우수성이 돋보이는 도자 문화의 번영기를 맞이하게 된다. 어떠한 양식에도 얽매이지 않은 표현의 자유가 엿보이는 분청사기는 대담한 생략과 과장된 표현으로 인해 해학적이었던 조상의 멋을 담고 있다. 비록 분청사기가 항아리, 대접, 접시, 병 등의 일상 생활용품으로 사용되어졌지만 그 속에서 숨쉬고 있는 장인 정신은 가장 한국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분청 사기에 시문 되는 문양 또한 다양하게 고안되었는데 자유분방함과 익살스러움이 특징으로, 주로 선(線)보다는 면(面)으로 표현하는 문양으로는 모란, 연꽃, 버들, 국화, 당초, 물고기, 어룡, 화조 등과, 나비, 매화, 빗방울, 여의두, 돌림 무늬 등이 있다.
대담한 생략 기법으로서 추상적이면서도 활달한 느낌을 주는 이들 문양은 질박하고 검소한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구김살 없는 내면 세계를 보여주는 듯, 분청 사기는 한국적인 미와 현대적인 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민족의 유산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백자철화 매화 대나무무늬 병      조선 17세기                                           


청화백자 용 구름무늬 호    조선 18세기
                                                                     
흔히 조선 도자는 백자라고 일컬을 정도로 백자는 대표적인 조선 도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 시대에 청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다면, 조선 시대에 백자가 발전된 까닭은 유교(儒敎) 때문이었다고 한다.

15세기 이전 백자의 모습은 대접이나 항아리에 담청회백색의 굵은 음각선으로 연당초문, 모란문, 초문 등을 간략하게 나타낸 뒤 철채를 하여 흑상감으로 나타낸 상감 백자들과 회백자(灰白磁)들이었다. 16세기 전반에 들어 백자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었다.
16세기 후반에는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간결하고 깔끔한 이름 모를 꽃들이 작은 그릇에 그려진 청화백자가 많다. 17세기는 조선적인 세계의 재발견 시기였다. 중국이나 일본은 화려한 채색 자기를 만들었으나 조선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걸어 산화철로 만든 철화백자에 운룡문, 초문, 매죽문을 그려 넣었다. 18세기는 고전적인 백자가 완성된 시기이다. 19세기는 백자의 전성기, 문양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십장생의 사슴과 불로초, 운학과 거북, 소나무와 바위, 해와 달의 멋진 모습과 운룡(雲龍), 운봉(雲鳳)의 활달하고 힘찬 모습이 그려졌으며, 그밖에도 연꽃, 잉어, 모란문 등과 산수 풍경의 정취를 살린 문양이 전개되었다.

조선 백자의 흰빛은 그냥 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젖빛이 혹은 물빛이 감돌아서, 중국 명대의 백자처럼 분바른 얼굴과 같이 보이지 않고 순박하고 수더분하게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화장하지 않은 여인의 깨끗하고 청초한 얼굴 그대로의 모습과도 같은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서 자연을 사랑한 한국인의 성정이 엿보인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프라하에서 비엔나로 -음악여행(1)- 스기모토타케시 저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1. 출발하기까지
올해에도 어딘가 해외로 나가고 싶다 생각하던 차에 일본 요한스트라우스협회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열어보니 협회 운영위원이며 지휘자인 S교수와 함께 프라하에서 비엔나까지 음악듣기 여행을 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프라하에서 오페라 [아이다]를, 비엔나에서는 무티의 비엔나필하모니와 아바드의 베를린필하모니를 듣고, 도중 자르츠칸마그드(Salzkammergut)에서는 백마정(白馬亭)에 숙박한다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플랜이었다. 이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신청한 것이 3월도 끝나갈 무렵이었다.

출발인 5월초까지 한달밖에 안남았다. 비엔나는 10년쯤 전에 방문한 일이 있어 약간의 자료가 있었으나 체코의 프라하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서둘러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옛날과는 달리 국립가극장이나 폴크스오퍼(Volksoper)의 5월 상연 목록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으면 되니 무척 편하다.

이번 여행의 또하나의 목적은 유럽에서 피씨통신을 해보는 일이었다. 돌아와서 읽지 못한 산더미같은 메일에 파묻히지 않도록 매일 니프티의 멜로(포럼의 하나)와 오페라 회의실을 읽고, 개인적인 메일에 답장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여행이야기를 나의 포럼 회의실에 보내려는 것이다. 해외로부터의 피씨접속은 중국에서 경험해보았으나 유럽에서는 처음이다. 그래서 방문하는 국가에 맞는 커넥터를 준비하는 등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또, 별도로 출발하는 피씨친구 가족하고도 여정의 접점(接點)인 비엔나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어, 여느 여행과는 한 맛 다른 기대감도 내포되어있었다. 처음 만남이라서 피씨로 사진을 교환했다.
또한가지, 내가 기획한 "지난날의 와인 모임" 이래, 꼭 찾아가 보고 싶었던 다뉴브 강변에 위치한 크렘스(Krems)의 와이너리도 친지를 통해 소개받는 등, 여행은 출발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2. 프라하까지
여행에는 많건 적건 돌발사건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것이 첫날 찾아왔다. 나리타에서 이미 알았기 때문에 혼란스럽지는 않았으나, 덴마크 교통기관의 스트라이크로 인해 코펜하겐 경유로 프라하에 가지 못하고 스톡홀름에서 어쩔수 없이 숙박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프라하 2박이 1박으로 되어버린 것이 뼈아팠다.

스칸디나비아항공의 기내는 중앙이 3명석이라 비교적 편했다. 자리를 잡고 나서 곧 노트북과 팅크패드를 꺼내 니프티 친구들에게 [메일]을 썼다. 버스는 흔들려서 무리지만 기내는 그런대로 서재 대용이 된다. 다만 동행자로 인한 기기(機器) 데모 등으로 배터리가 적신호를 보내 절반밖에 쓸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스웨덴의 호텔은 전화료가 비싸다고 해서 접속은 단념하고 충전만 해 둔 다음 늦은 저녁을 먹고 취침. 그 후로 이틀동안 통신을 할 수 없어, 그 때 연결했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다음날에도 프라하로는 직행하지 못하고, 부륫셀을 경유하여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 거의 다 될 무렵이었다.

3. 프라하의 인상
공항에서 프라하 거리로 접어들자 육중한 클래식 건축과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 전화(戰火)를 면한 [북쪽의 로마]라고 불릴만 한 멋진 거리였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스프레이 낙서는 이 나라 이 거리에서 감수하던 복잡한 역사를 일러주는 듯 했다.

점심식사 후, 하필이면 무섭게 내리는 비를 만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자동차로 프라하성과 카렐교(橋) 등을 본 다음 호텔에 들었다. 여기서 서둘러 피씨접속을 시도했으나 룸의 전화선이 빠지지 않고, 담당자는 퇴근한 뒤였다. 무인 비즈니스센터에서 시도해봤지만 제대로 되질 않는다. 그러는 동안 오페라에 갈 시간이 되어 접속은 단념해야 했다.

프라하국립가극장은 멋진 건물이었다. 현재의 극장은 1887년에 건축된 네오르네상스 양식 건물로, 여기저기 삽입되어있는 조각과 천정화는 참으로 훌륭했다.
프라하는 보헤미아의 중심도시도서 오래전부터 융성하던 곳인데, 모차르트도 세 번에 걸쳐 각각 한달 정도 체재하였고, 1787년에는 [돈죠반니]를 국립극장에서 초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오늘밤 공연은 베르디의 [아이다]. 바그너도 모차르트도 그리고 베르디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쁘기 그지없다. 좌석은 앞에서 7번째, 좋은 자리다. 이 자리가 830코르나, 1코르나가 약 4엔이니 약 3,500엔으로 참 싸다. 일본이라면 8천엔은 좋이 할 것이다.
오페라는 체코인 지휘자와 가수에, 가사는 이태리어였기 때문에 자막이 체코어로 위쪽에 나타났다. 읽어도 알 수 없으니 무대에 집중할 수 있었고, 또, 여러번 보고 들은 오페라여서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아이다역의 제포르토바라고 하는 소프라노를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들어 귀국 후 오페라 프로그램을 찾아보니, 1985년 프라하국립가극장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 [돈죠반니]의 돈나.안나역을 맡아 노래불렀음을 알게 되어, 역시,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