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가 보셨나요?   -   기행문 [紀行文]

올 가을 여행은 '지리산 1박 여행'으로 결정되었다는 안내장이 날아왔을 때 사실 난 걱정이
앞섰다. 말이 쉽지 버스를 네시간 이상 탄다는 게 내 나이에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만약 허리디스크라도 도질 양이면 일행에게 엄청난 폐를 끼칠텐데....
하지만 난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아직 내 두 발로 씩씩하지는 못할망정 남만큼 걸을 수
있을 때 따라 나서는 거다! 난 우선 필요한 약 보따리부터 챙겼다.

아침 내내 버스에 시달리다 오후 두시가 넘어 들어서게 된 지리산에서 굳이 반세기 전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첩첩산중에서 빨치산이 어떻게 목숨을 이어갔건,
지금 내 눈앞의 장관을 망막에 찍어 넣으면 되는 거다. 원래가 단풍을 자랑하는 산이
아니니 별 기대를 안 했건만, 한굽이 돌아설 때마다 펼쳐지는 색의 향연에 와아!
탄성이 절로 입술을 탄다. 웅대한 지리산은 품안에 무수한 고찰을 끌어안고 있었다.

맨 먼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남원 실상사,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면서, '바로 보는 우리 문화' 라는 대단한 이름의 여행사 젊은 사장이 찬찬히
구산선문부터 설명하기 시작한다. 은퇴한 대학교수 등등 학구파 친구들은 열심히
귀 기울이지만 나 같은 보통사람은 경내를 한바퀴 돌며 법당을 타고 흐르는
가을바람을 쐬는 게 고작.

노고단도 들르지 못하고 그대로 산을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먼산으로 떨어지는
해 구경을 한 건 뜻밖의 큰 수확이었다. 그렇게 이글이글 탈수는 없었다.
그렇게 붉을 수는 없었다. 산너머로 떨어진 줄 알았던 해를 다음 굽이에서 또다시
마주했을 때, 나는 심산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황홀함을 제대로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숙소에서의 저녁 세미나(?!)에서, 합창대회 참가 멤버들이 벌인 기막힌
20부 아카펠라는 부르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배꼽을 붙잡고 웃게 만든 해프닝이었다.

간밤에 둥근 달이 그림처럼 매달려 있더니 오늘은 그야말로 청명한 가을날씨다.
오랜 시간을 버스에 시달리고, 밤에는 정담을 나누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잤으련만
아침에 식당으로 모여든 친구들의 얼굴은 한결 젊고 싱싱해 보였다.
지리산의 첫 사찰이라는 연곡사도 좋지만, 뭐니뭐니 해도 화엄사가 내겐 으뜸이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초입이고, 워낙 유명한 사찰이라 주위가 세속에 물들어 있긴 해도
일단 긴 계곡으로 들어서면 잡념을 깨끗이 씻어주는 자연이 있다.
어제에 이어 여행사 사장의 열성적인 해설이 이어졌지만 나는 무리에서 떨어져
지난번에 느꼈던 신비로움을 되새기면서 돌계단을 오르내린다.
여전히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는 석등, 나란히 서 있는 사자탑, 그것이 언제 무슨 연유로
그 곳에 놓여졌는지 몰라도 좋다. 조상들의 뛰어난 미의식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일년을 손꼽아 기다리던 친구들과의 1박 2일 나들이는 야속하리만큼 빨리 지나갔다.
앞으로 이런 즐거움을 과연 몇 번이나 함께 나눌 수 있을까......
돌아오는 버스 창 너머에 어느 새 달이 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친구들이 하나 둘 부르기 시작한 달 노래에는 헤어지는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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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해낸 뿌듯함   -   잡문 [雜文]

신문의 여행사 광고를 들여다 보다가, 일본의 저렴한 벚꽃나들이 상품이 눈에 띄자
그만 허파에 바람이 들기 시작, 부리나케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미주알고주알 캐묻고는 일본 비자 날짜를 확인하려고 문갑 서랍에서 여권을 꺼내봤더니
이게 웬일,  비자날짜는 아직 멀었는데 여권이 3월 10일자로 만료되어있지 않은가!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조금만 일찍 들여다봤어도 간단히 3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을,
거금 4만여원에 사진 새로 찍어야 하고, 이런저런 서류 만들어야 하고, 아아, 그보다
어느 여행사에 부탁을 해야 한담. 저녁에 남편에게 슬쩍 SOS를 쳤더니 ,
"혼자 외국 여행 다니고, 컴퓨터까지 다룰 줄 안다고 으스대는 양반이 그깟
여권신청 하나 본인이 못하시나" 라고 빈중대는게 아닌가. 나는 무안하기도 하고
슬그머니 약이 오르기도 했다. 좋다. 내가 한다. 못할것도 없지.
 
새로 사진 찍은게 영 후지게 나왔지만, 맞선 사진도 아니니 상관없다, 주민등록 등본에
주민등록증 앞 뒤 복사한 것, 구 여권 복사, 도장등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출전용사처럼 보무도 당당히 종로구청으로 향했다.
여권신청소는 4층, 한 번에 못하고 다시 올 일이 생기면, 이 많은 계단을 또 기어올라가야
되겠구나,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난다.
홀 안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창구마다 북적거렸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인상 좋은 젊은이를 골라
"신청용지 어디 있어요?"
"네, 저쪽 안내에 가시면 줍니다" 싱끗 웃는 인상이 딱 내 타입이다.

용지 한 장을 받아 들고 의자가 있는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았다. 유리판 밑의 견본을
주시하면서 차근차근 칸을 메꾸고 나서 신청인 옆에 멋지게 싸인까지 하고 사진을
붙인 뒤, 남은 사진 한 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다시 먼젓번 젊은이를 찾았다.
"저, 이거 어떻게 하는거죠?"
"이리 주세요, 제가 해 드릴게".
성품은 인상대로 간다. 테이블 위의 이상스런 작은 통에다 사진을 넣고 누르니까
사진이 깨끗이 도려지고, 그걸 조그만 비닐 주머니에 넣어 테이프로 붙이더니
"요기에 수입인지를 사서 석장 붙이세요"한다. 
"네? 석장이라뇨?"
"45,200원 내면 석장을 주거든요. 그럼 요기에 나란히 붙이세요"
"고맙습니다. 저어, 근데 어느 여행사이신가요?"
"네, 저희 여행사는 방송국에만 드나들어서 말씀드려도 모르실꺼에요".
또 싱긋 웃는 모습이 탤런트 뺨치게 매력적이다.

나의 생활신조 중에 [모르는 것 물을 땐 꼭 젊고 날씬하고 깨끗하게 생긴 남성에게]가
있는데, 이건 외국에 나가서도 시도해봤지만 백발백중 원하는것 이상을 얻을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난 한 번도 퇴짜 받지 않고 곧바로 신청을 접수시키고 돌아왔다.
그리고 한가지를 터득했다. 무슨 일이건 직접 본인이 하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그리고 떳떳하고 자신감도 생긴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당당히 말했다.
"여보, 당신 여권 재발급 받을 땐 내가 해 드릴게, 당신은 늘 바쁘잖아"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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