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譯] 윤오영님의 수필 '초가을'   -   번역 [飜譯]/韓日飜譯 [한일번역]

初秋四十峠れためのかな女人目元のようだ. 人生四十歳からとの言葉があるけれども四十歳人生初秋である. それにれるのが女人目元ではないかとわれる. 十代少女えれば二十代. よくいよくずかしがるきれいなしい. 三十代になると灼熱りをわせつつろうとする情熱えようか. 六月炎天水銀柱上乘することのみ花火. しかし四十峠ると何時しか目頭たいきが眞珠のようなには聡明までまれる. 人生吟味しつつ生活をもう一度整えようとする知性意志のない精出しにったらの目付きには哀愁宿. 五十六十にはすでにである. それ故私初秋四十峠れた女人目付きと.

はきれいなしみやかなしむ. しむという言葉はすごくするという意味. 譚元春うひと文人男性季節韻士季節だとべた. えれば佳人高僧出会った格好, えれば貴人てて淸泉白石間詩人格好, えれば古拙老人てて雨降夜靑燈下英雄格好だとった. どこまでも女人はますらおのかす季節うのだ. しかしながらればてがになればてがである. その上人間には人間自らの年齡って, , , があるのだ. 尚最銳敏れるのが女人目付きではなかろうか.

はまだ日差しががってだが朝夕肌寒気温ですでになのだ. 新鮮んで一筋ややかな気温何時交差させる. だに豐滿々しくて情熱いが昨日じだった女人目付きからどことややかな一筋いた垣間見, 人生初秋じさせるのだ. そしてみのある愛情一生正直対話はここでしくなるのだ. なぜに高僧英雄のみだろうか.

々がよく, 山川塑造なる風景, 々で, りなく江水, らかな. しかし山川めてまれたのではない. 黃菊, , のような. だが紅葉してになりいたのではない. ましてや葉末宿とか靴脱虫等るにらないものが感情うことになんの値打ちがるのだろう. 檀園群仙図たことがある. , , っている, めにっている, っている, をついて, をはだけている, している, 裸足でいる, 禿頭, , 人等いろんながあった. 一人一人物珍しい姿であった. しかしつというのがなんで神仙でありしているのが神仙だろうか. そのようなはいくらでも. だがそのてが何処かしら脫俗仙風神韻にくるまれているのだ. それすべての奇形々が皆神仙としてれる. いや石一, 草一株までも仙境でないとはられないになるのだ. ついに檀園胸中ちた神仙等筆先のようにくのをられる. しかしその一人一人姿った群仙圖には. 一筋気配るとこのてがである. だけがではない. 昨日見ではない. だけがではない. むしたもすでに. って血管がすでにであり, 眼球がすでにである. とてどうかられられようか. だからこそえるてがなのだ. しかしることも出来ない. それ故月でありでありでありでありなのだ. それでくのだ.

四十代った女人から初秋ずるとったがこれのみではない. 手入れをする中年農夫頑丈からも初秋じるのだ.

 

초가을  윤오영

초가을은 사십 고개를 접어든 조용 나직한 여인의 눈매와 같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거니와 사십은 실상 인생의 초가을이다.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닌가 한다. 십대의 소녀를 봄의 푸른 싹과 같다면 이십 대는 꽃봉오리다. 웃음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은 곱고 아름다운 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작열한 향기를 피우며 떨어지려는 정열의 꽃이랄까. 오뉴월 염천의 수은주와 같이 상승할 줄만 아는 불꽃이다. 그러나 사십 고개에 들어서면 어느덧 눈가에 싸늘한 침착성이 나타나며 진주 같은 눈에는 슬기로운 이슬까지 돈다. 인생을 음미하고 생활을 다시 한 번 가다듬으려는 지성의 의지와 알뜰한 부지런에 틀이 잡혀 갈 때 그의 눈매에는 엷은 애수가 깃든다. 오십에 서리가 앉아 육십이면 이미 겨울이다. 그래서 나는 초가을을 사십 고개를 접어든 여인의 눈매라고 한다.

여자는 고운 봄을 슬퍼하고 남자는 시원한 가을을 슬퍼한다.’고 한다. 슬퍼한다는 말은 지극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담원춘(譚元春)이란 예전 문인은 가을을 장부의 계절이요. 운사(韻士)의 계절이라고 했다. 가을을 봄에 비하면 가인(佳人)을 놓고 고승(高僧)과 만난 격이요, 여름에 비하면 귀인(貴人)을 버리고 청천백석간(淸泉白石間)을 놓고 시인과 노는 격이요, 겨울에 비하면 고졸한 노인을 버리고 비오는 밤, 청등 밑에서 영웅을 만나는 격이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여자는 봄이요, 가을은 장부의 가슴을 움직이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봄이 되면 모든 것이 봄이요, 가을이 되면 모든 것이 가을이다. 더군다나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의 연령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음에랴.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 여인의 눈매가 아닐까.

낮에는 아직도 불볕이 끓어 여름이건만 아침, 저녁으로 싸늘한 기운이 이미 가을이다. 이 신선한 바람이 실어오는 한 줄기 싸늘한 기운이 어느덧 여름과 가을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아직도 풍만하고 씩씩하고 정열과 웃음이 어제와 같은 여인의 눈매에서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한 줄기 침착(?)의 선()이 엿보일 때, 인생의 초가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깊이 있는 애정과 일생의 참스러운 대화는 여기서 즐거워지는 것이다. 어찌 고승이나 영웅뿐이랴.

가을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흔히 달을 말하고, 산천의 소조한 풍경을 말하고, 드높고 맑은 하늘을 말하고, 끝없이 푸른 강물을 말하고, 맑은 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달과 산천과 하늘과 강이 가을에 비로소 생긴 것은 아니다. 단풍을 말하고 황국(黃菊)을 말하고, 벌레 소리를 말하고, 구슬 같은 이슬을 말한다. 그러나 단풍이 들어서 가을이 되고 국화가 피어서 된 것은 아니다. 하물며 풀끝에 맺힌 이슬이나 섬돌 밑에서 우는 벌레들의 대단치 아니한 것이 가을의 벅찬 감정을 노래하는 데 무슨 값어치가 되랴. 그러나 나는 단원(檀園)의 군선도(群仙圖)를 본 적이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돌에 걸터앉은 사람,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사람, 일어서 있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오는 사람, 가슴을 내 놓고 있는 사람, 배를 내 놓고 있는 사람, 맨발로 있는 사람, 대머리진 사람, 눈썹이 긴 사람, 수염이 많은 사람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하나하나 신기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바둑을 둔다고 무슨 신선이며 배를 내 놓고 있다고 무슨 신선인가.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체가 어딘지 알 수 없는 탈속(脫俗)된 선풍신운(仙風神韻)에 휩싸여 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기형스러운 사람들이 모두 다 신선으로 나타난다. 아니 돌 한 개, 풀 한 포기까지도 선경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 된다. 비로소 단원의 흉중에 가득 찬 신선들이 그의 붓끝에서 바람같이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양을 떠나서 따로 군선도는 없다. 한 줄기의 가을 기운이 일어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가을이다. 단풍만이 가을이 아니다. 푸른 솔도 어제 보던 솔이 아니다. 이슬만이 가을이 아니다. 이끼 낀 돌도 이미 가을이다. 따라서 내 혈관에 도는 피가 이미 가을이요, 내 눈망울이 이미 가을이다. 낸들 어떻게 가을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 모두 다 가을이다. 그러나 가을은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달이요, 물이요, 이슬이요, 하늘이요, 벌레 소리다. 여기서 가을을 보고 가을을 듣는 것이다.

나는 사십 대에 들어선 여인의 눈매에서 초가을을 느낀다고 했거니와 어찌 이뿐이랴. 가을걷이를 하는 중년 농부의 억센 팔뚝에서도 초가을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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