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토막상식 -6- <切腹, 月代, 水戶黃門 >   -   번역 [飜譯]/일한번역 [日韓飜譯]

* 왜 무사는 셋푸쿠(せっぷく-切腹)라는 방법을 취했을까?
셋푸쿠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본인 특유의 자살 방법이다. 그들은 옛날 무사들이 배를 가르고 죽었다는 것에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외국인이 볼 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야만적인 방법이다.

사실, 배를 가르는 것보다 심장이나 목을 찌르는 편이 훨씬 쉽게 죽을 수 있음을 알았을 터인데 왜 그들은 굳이 끔찍한 고통이 따르는 배가르기를 택했을까?
그것은, 옛날 사람들은 혼(魂)이 뱃속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키모다마(肝玉-간덩이)]니 [키모오츠부스(肝をつぶす-간담이 서늘해지다)]라는 말이 있듯, 두뇌보다 뱃속의 장기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혼이 들어있는 배를 갈라 그 속의 창자까지 끄집어내면 죽음과 직결한다는 사상이 생겨난 것이다.

고대에는 셋푸쿠를 하지 않고 목을 치게 해서 죽는 예가 많았으나, 시대가 카마쿠라(鎌倉).무로마치(室町).전국(戰國)으로 흐름에 따라 무사 사이에서 셋푸쿠가 성행하게 되었다. 셋푸쿠는 무사만이 해낼 수 있는 용감한 자살방법이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르는 셋푸쿠를 일반 서민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만큼, 무사들에게 있어서는 뚜렷한 의지를 과시하면서 죽는, 이른바 최고의 데몬스트레이션이 되었던 것이다.

에도(江戶)시대의 셋푸쿠는 무사를 대상으로 제정된 가장 엄한 중벌이었다. 게다가 강제 자살이다. 사무라이들 중에는 볼썽사납게 소란을 피우는 자도 있어, 그것을 무사다운 형 집행으로 끝내기 위해 [카이샤쿠닌(介錯人)]을 붙여 뒤에서 목을 치게 했다.

* [사무라이(侍)]가 정수리를 시퍼렇게 미는 이유는?
헤어스타일의 변천도 고대로부터 참으로 다양했다. 야마토초오테이(大和朝廷) 스타일, 잔기리(散切り) 머리, GI컷, 히피풍, 테크노컷, 염색머리 등등. 그 가운데 촘마게(丁 )라는 상투도 유니크한 헤어스타일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옛날 무사는 춈마게를 하는 경우 정수리를 시퍼렇게 밀었다. 사카야키(月代)라 부르는데, 매우 산뜻해 보이기는 하지만 물론 멋을 부리기 위해 미는 것은 아니었다. 사카야키는 이를테면 전투가 일어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출전한다는 무사의 전투태세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전국시대의 무사들은 적과 싸울 때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을 했다. 그런데 이 투구라는 것이 굉장히 무거운데다 바람도 잘 통하지 않아, 무더운 여름철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는 그야말로 두통거리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머리카락의 앞부분을 깎아버리는 것, 그렇게 하면 머리속이 짓무르는 일도 없고 약간은 시원하기도 할테니까....

이 습관이 태평시대 후에도 지속된 것은 무사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즉, 싸움만 일어나면 언제든지 출전한다는 충성심을 사카야키로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정수리를 미는 것은 성주를 받들고 있는 사무라이의 특권이었다. 일단 성주를 떠난 로닌(浪人)은 모두 머리를 길렀다. 그런 뜻에서 사무라이가 사카야키를 미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을 로닌과 구별하고자 하는 엘리트 의식이 내포되어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카야키가 인기를 끌게 되자 일반 남성 사이로 점차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 미토코오몬(水戶黃門)의 [코오몬]은 무슨 뜻?
미토코오몬은 우리나라의 [어사 박문수]만큼이나 유명한 인물이다.
스케(助)상, 카쿠(格)상이라는 두 부하와 함께 전국을 주유하면서 약자를 돕고 강자를 억제한다.
위기에 처할 때는 일본의 마패라 할 수 있는 토쿠가와(德川)가의 문장을 꺼내들고 [이분이 누군줄 아느냐. 거룩하신 추우나곤(中納言) 미토미츠쿠니공이시다] 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면 우리의 어사 출동과 마찬가지로 악당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기본 패턴이다.

그런데 왜 토쿠가와미츠쿠니를 [코오몬사마(黃門樣)]라 불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츄나곤(中納言)이라는 관명(官名)의 별칭이 바로 [코몬]인 것이다. 조정의 관제는 원래 당나라의 율령제를 본 떠 만든 것으로, 중국에서는 문하성이라는 부서의 차관 명칭을 [코오몬지로]라고 했다. 츄우나곤은 태정관의 차관에 해당하며 그 직위가 코오몬지로와 같아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코오몬사마]는 미도번(水戶藩)의 2대 번주인데, 당시 토쿠가와막부의 봉건주의는 높은 분을 혼자 돌아다니도록 놔두는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 전국을 유람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코몬주유기'가 나돈 것은 봉건제의 악정 하에서 고통을 당하던 백성들이 코몬사마와 같은 구세주의 출현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의 코몬사마, 곧 토쿠가와미츠쿠니는 대단한 명군으로, 문무를 장려하면서 번사를 제대로 다스리는 등 영민 통치에 뛰어난 정치수완을 발휘했다. 이 분의 공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대일본사] 편찬이라는 사업이다. 미츠쿠니는 에도의 번저(藩邸)에 창고관이라는 학문소를 두고, 여러 학자를 모아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중의 한사람이 사사키스케사부로, 곧 스케상이고, 카쿠상은 미도번의 비서격인 사람으로, 이 두사람이 자료수집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녔던 것이 코몬주유기의 줄거리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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