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삼총사의 홋카이도 나들이   -   기행문 [紀行文]

젊지도 않은 여자 셋이서 치토세공항에 내린 것은 오후 1시 50분, 11월 초인데도 확실히
홋카이도의 바람은 매섭도록 차다. 우리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충동적인 것이었기에 별로 사전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다.
한사람은 보너스 티켓이 생겼고, 한사람은 집안에 경사가 있었고, 또 한사람은 여름내
일한 번역료가 들어왔기에,  그래, 우리도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 좀 써보자, 하고
서둘러 짐을 꾸렸던 것이다.
요행히 친지가 한분 삿포로에 계셔, 우린 무작정 그분에게 매달리기로 하고 일정도
제대로 짜지 않은채 비행기 타는데만 급급했다.

6년만에 만나는 친지는 약간 살이 올랐으나 예전보다 더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우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차에 오르자 우선 스케줄 표를 건네준다. 너무나 면밀하게
짜여 있어 사견(私見) 따윈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친구들은 송구스러운지 고맙다는 말을 더듬는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4박5일 홋카이도 여행은 시작된 것이다.

우선 연어떼가 튀어 오른다는 '인디언 수차'라는 곳엘 갔는데, 이미 시즌이 지난 뒤여서
아무리 난간을 붙잡고 내려다봐야 한 마리도 나타나질 않는다. 아쉬움을 남긴 채
시코츠호(支笏湖)로.
대자연에 둘러싸인 조용한 호수는 철지난 쓸쓸함을 달래듯 가만히 일렁이고,
보트 한척 없는 선착장 까지 코트 깃을 올리고 걸어 보는 우리들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바람은 초겨울의 입맞춤처럼 싱그럽다.

그 고장 명물이라는 감자 코로케와 옥수수구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맛하고는 어딘가 다른,
조금 더 진하고 고소하다고나 할까, 하여간 맛이 있었다. 우린 차안에 냄새를 잔뜩 풍기며
뜨거운 녹차와 함께 열심히 먹었다. 그러면서 기어이 홋카이도에 왔구나 실감한다.

4시가 넘자 벌써 초겨울의 짧은 해가 기울기 시작, 우리는 서둘러 삿뽀로시에서 조금
떨어진 죠산케이(定山溪) 온천장으로 향했다. 홋카이도에서 첫째로 꼽는다는
죠산께이뷰호텔에 친지의 특별배려로 60%나 디스카운트를 받고 체크인, 첫날부터
초호화판이다.
7층에 있는 화실로 날라온 저녁식사는 소식하는 일본인들이란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짐했다.
지하의 온천장 역시 스케일이 크고 시설이 디럭스하다. 요통에 시달리는 A는 꼭대기에서
쏟아지는 폭포수에 허리를 갖다 대고, 나는 밑에서 솟구쳐 오르는 스쿠류에 발바닥
맛사지를 즐긴다.
유리문 밖의 노천온천은 사람 하나 없이 교교하기만 한데, B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재채기를 하더니 머리를 저으며 돌아온다. 아무래도 초겨울의 노천온천은 무리겠지.
초저녁잠이 많은 A는 곧 곯아떨어지고,  B와 나는 밤새 뒤척이면서 낯선 고장의
첫 밤을 지샌다.

일찍 일어나 온천욕을 한번 더 하고, 일본식 뷔페로 아침식사를 마치자 여덟시 반,
친지는 약속대로 정각에 마중을 왔다. 그는 드라이버겸 가이드겸 사진사노릇을 하려고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  몫 좋은 곳만 나오면 상세한 설명과 함께 증명사진을 찍어 준다.

츄산토게(中山峙)까지의 드라이브 코스는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깊은 숲이 더러는 눈에 덮여 있고(며칠 전에 초설이 내렸단다) 더러는 곱게  
단풍져 있는데,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몸을 떨고 있는 잡목들은 머지않아
혹독한 겨울이 다가옴을 호소하는 듯 했다.

서서히 걷히고 있는 안개속, 토야코(洞爺湖) 전망대 앞에서 그림 같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든다. 천만엔이 넘는다는 박제 곰을 배경으로
또 기념촬영.

 

 

쇼와신잔(昭和新山)이라는 화산에서 잠깐 쉬기로 한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물을
가까이에서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왠지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중에 잠시 들른 유리제품 전시장에서 수집품인 종을 예쁜 것으로 한개 골랐다.
그러고 보니 일본인들은 도자기와 유리제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가 보다.
홋카이도의 한 귀퉁이에 있는 전시장에 이태리 무라노글래스를 비롯해서 유럽 각국의
명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는걸 보면서, 저런 고가품을 누가 산담,
쓸데없는 걱정까지 해본다.

점심은 노보리베쓰의 조그만 라면집에서 삿뽀로 라면을 먹었다. 기름지긴 해도
국숫발이 쫄깃하면서 독특한 맛이다. 한두평짜리 작은 식당의 화장실이 얼마나
깨끗하고 예쁘던지.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이었는데도 냄새는커녕 상큼한 비누향만이
은은히 퍼져 있었고, 세면대 위의 커튼이 쳐진 작은 들창가에는 꽃꽂이한
들국화까지 놓여 있었다.
우리네 고속도로 휴게실의 화장실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배울 점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절감했다.

시라오이(白老)에 있는 아이누 민속촌을 찾았다. 입구에 코탄코루쿠루라는 거대한
아이누상을 바라보면서, 아이누족이 잘생긴 민족이었다는 나의 예비지식이 말짱
헛거였음을 깨닫는다.
아이누인 차림의 여인들이 민예품도 팔고 돈 받고 함께 촬영도 해준다.

아이누인의 집안구조는 좀 독특했는데, 유목민들의 이동식 가옥과 흡사하기도  하고,
아무튼 원 룸 시스템으로 땅에서 한 길 높이에 타타미를 깔아 논 데가 방인 모양이었다.
우린 그 방에 걸터앉아
벽에 붙어 있는 간단한  아이누어, 뽀로(큰) 또(호수) 고딴(마을) 등을 중얼중얼
외어 보았다.

시간이 좀 남아 찾아간 곳이 굿따라호(湖), 산속에 포옥 파묻혀있는 자그마한 호수지만
상처입은 사람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것만 같은 신비스럽고 절박한 분위기를  
안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는 조용해졌다. 무슨 생각들을 하면서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유리알 수면을
응시하고 있는걸까. 내 입에서 조용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갯길에서 여우를 만났다. 차나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를 않는다. 먹다 남은 코로케를
던져 줬더니 잽싸게 입에 물고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정말 여우같이 예뻤다.


노보리베쓰의 로얄야꼬-라는 호텔에 우리를 체크인 해주고, 아침부터 하루종일
애쓰던 친지는 삿뽀로로  돌아갔다. 호텔이 어제보다 떨어지니 저녁식사도 내용이나
맛이 어제보다 훨씬 못하다. 그래도 우린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지하의 온천장도 랭크가 하나 아래였는데, 일본 곳곳에서 무리지어 온듯한 할머니들
가운데 우유빛의 노랑머리 글래머들이 몇명 끼어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알고 보니 그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삼바를 추는 남미 아가씨들이란다. 어쨌거나
싱싱한 이방인의 나체를 실컷 구경하고 산책삼아 밖으로 나갔다. 온천장이라서 그런지
커피숍 하나 눈에 띄지 않고 그저 선물가게일색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방울이 들어있는 조그만 도깨비인형을 하나 샀다.
홋카이도와 도깨비와 무슨 인연이 있는지 곧잘 뿔 달린 도깨비상이 눈에 띈다.
혹 떼러 갔다 하나 더 붙이고 오는 옛날 이야기의 원조가 바로 이곳인가 하는
웃기지도 않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호텔 우산을 빌려쓰고 곰 목장으로.
비오는 날은 리프트가 늦게 가동한다고 하여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떻게 이 꼭대기까지 저 많은 곰들을 운반하였을까.
집채만한 불곰들이 두발로 서서 먹을것을 달라는 폼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따로 모아 놓은 새끼 곰들을  배경으로 우산을 쓴 채 기념촬영했는데 과연
제대로 나오기나 할는지....  

비 때문에 곰들의 쇼는 취소한다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하산, '지옥계곡'이라는
화산터를 보러 갔다.  어제 산 위에서 내려다보며 탄성을 올렸던 바로 그곳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방대한 규모의 화산 터를 유보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여기저기서 뽀글뽀글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약사여래를 모셔 논
쬐끄만 사당이 있어 백엔을 놓고, 끓어오르는 물을 돌부처에 끼얹은 뒤 가시와데를
두번 쳤다. 그리고 합장한 채 가내평온을 잠깐 빌어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지 않던가.

점심은 脫 日本食을 하기로 하고 조그만 카페를 찾아 들었는데, 코앞에 서 튀겨 준
가쯔카레-가 얼마나 맛이 있던지.

두시 정각에 장대비를 무릅쓰고 친지가 찾아왔다. 기차시간까지 여유가 있다면서
그가 수족관엘 안내했다. 근데 이 촌구석 온천마을에 왠 서양식 고성?!
우린 처음부터 질리고 말았다.
수족관이니까 물고기 많이 모아 잘 간수하는 건 당연하다 치더라도, 건물 안팎을
그처럼 세련되고 품위있게,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을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노보리베츠 마린파크 닉스]인데, 닉스(NIXE)라는 한가운데
자리한 성은 덴마크의 오덴세시 교외에 실존하는 중세 르네상스양식의 아름다운
고성 [이에스코성]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나. 성 앞 광장을 둘러싼 예쁜
서양식 건물 안에는 갖가지 수입품 가게에 서양식 음식점에 기념품점에 홋카이도
특산품점에...
확실히 그들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간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 입맛이 씁쓸했다.

노보리베쓰역에서의 해프닝.
친지는 차를 파킹하러 가고, 우린 역내로 들어가 느긋하게 앉아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착각했는지 우린 30분쯤 시간이 남는 줄 알고 있었다),
기차표를 확인하러 갔던 친구가 역무원과 몇마디 주고받더니 갑자기, '얘, 저 기차래.'
하면서 구내에 정차하고 있는 기차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뒤미처 들어오던 친지가 '네? 저 기차라구요?' 내 가방을 낚아채 들고 뛰어가면서
빨리 따라오라 고함을 친다. 구름다리를 건너서 맞은편까지 가야 하는데 마음은
조급하고 다리는 안 떨어지고. 아무튼 죽을힘을 다 해 뛰어가서 극적으로 기차에
올라타려는데, 친지의 다급한 목소리,
'모 히토리 이마스 (한사람 더 있어요)'
역무원과 이야기하던 친구가 무거운 가방을 낑낑 매면서 들고 뛰느라 자꾸 쳐지니까,
기관사에게 소리치는 말이었다. 친구가 오르자마자 기차는 움직이고 친지와 나는
목청을 높여 '고맙습니다'  '내일은 못나옵니다' '네, 우리가 알아서 할께요'.
겨우 자리를 찾아 앉은 뒤 땀을 닦으면서 우린 한참을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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